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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찾는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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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길찾는 책읽기}
19호실로 가고 있다

잉여인간  date. 2018.11.07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의문의 여성작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어떻게 내 의식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다시 찾으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1년에 500파운드라는 돈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며, 자물쇠를 단 방은 홀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외쳤다. 여성이 자유로운 창작을 하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데, 이 때 ‘자기만의 방’이란 독립된 경제 주체로서의 활동과 아내나 어머니로서가 아닌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독립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지금, 아내이자 엄마,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자 사람인 나도 ‘나만의 방’이라고 애써 명명한(그러나 기필코 나만의 방일 수 없는) 방으로 들어갈 때면, 찰칵 소리를 만들어 문을 닫곤 한다. 그 어느 날도 ‘찰칵’하는 소리자물쇠를 잠그고 습관처럼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검색 창에 <19호실로 가다>를 두드리고 인터넷 서점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보았으나, <19호실...>(줄여서 표현하기로 함)을 찾는 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미 절판에 품절까지 되었단다. 그렇게 <19호실...>은 절판과 품절 상태로 의식 저편에 남아 있다가 또 다른 어느 날 불현듯 소환되었다. 자발적 글쓰기-<우주마가린>의 그녀들과 함께 있는 자리였는데,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읽고 글을 써보겠다”는 우발적 발언이 ‘자발적 글쓰기’가 되고 말았다.



자발적 글쓰기 [우주마가린]


# 검색창에 ‘자발적’이라고 두드린다.

자발적: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아니하여도 자기 스스로 나아가 행하는. 또는 그런 것.'


그렇다면 ‘자발적 글쓰기’는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아니하여도 자기 스스로 행하는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 그 다음엔 ‘자발적 글쓰기’를 두드려 본다. 웹 사이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https://www.spacemagarine.com/
자발적 글쓰기 | 우주마가린 |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 기획자, 연구자, 행정가 등이 모여 만든 웹진. 전략적 콘텐츠는 없지만 솔직한 필자와 정성스런 독자가 되고자 한다.


나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도 아니고, 기획자도 행정가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그들 주변에서 그저 갖가지 텍스트를 씹어 먹고 있을 뿐이다. 어쩌다 박제된 글들을 간간히 토해내기도 했는데, 거기엔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텍스트들의 유희만 있었지 나는 없었다. 글 쓰는 이에게 ‘글’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 나를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물론 비공개를 목적으로 하는 일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속의 나는 온전히 자발적이고 자기고백적인 반면에, 그 나는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져 감금되어 있다는 이유에서 그러하다.


글쓰기, 곧 문자를 통해 타인에게 나를 자발적으로 노출시키는 행위의 이유와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가장 먼저 자기고백적인 글쓰기를 떠올려 본다. 1990년대 여성 문학가들에 의해 담론화된 여성적 글쓰기가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영웅들의 자서전과 그에 반하는 소박한 자전적 에세이들, 그리고 영웅적 정치인 만들기의 전략적 도구로서 자전적 글쓰기가 있다. 사실 그것이 여성과 소박한 필자들의 글이든 영웅의 이야기든, 자기고백의 낯뜨거움으로 치부 또는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 또한 그러한 독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마치 ‘자발적 글쓰기’를 ‘자기고백적 글쓰기’로 치환시키고자 하는 듯 보이지만, 굳이 엮어보자면 나의 자발적 글쓰기를 위한 자기고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전략적 콘텐츠는 없지만 솔직한 필자와 정성스런 독자가 되고자’ 자발적으로 우주마가린에 승선, 낯선 그녀들과의 방담을 시작으로 우주마가린의 유영에 합류했다. 비자발적인 글 한 편을 남기고 표류하던 중, 다소 우발적인 터트림의 순간이 자발적인 글쓰기가 되었음을 말하기 위해 역시나 거창하게 서두를 열고 말았다. 그날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그 책 <19호실...>로 가는 길에 여러 마주침과 생각의 갈래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잠시 들어갔다가 영화 ‘디 아워스’를 다시 봐야 했고, 자신의 삶을 글로 써 내려간 또 다른 여성들을 만나면서 페미니즘과 같은 불편한 이야기들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19호실...>과의 만남, 이 글을 시작으로 당분간 그 갈래들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이경애_1.PNG



‘19실...'로 가는 길


그녀를 만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4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녀가 19호실을 찾아 헤매는 숨 막히는 무기력함과 그 치열함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그녀의 19호실을 찾아 나선 나의 여정을 좀 더 긴 호흡으로 말하고 싶다. 손닿을 수 있는 모든 온라인 서점은 절판, 품절이었고, 학교 도서관의 그 한 권은 꽤나 긴 기간 동안 대출중 이었는데, 이 아이러니한 반가움이란... 기다리다 못해 내가 거주하는 이 도시의 여러 공공도서관 중에서 단 두 곳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봄을 부르는 빗줄기가 아직 채 피우지도 못한 목련꽃 봉우리를 두드리던 그 날 저녁 집을 나섰다. 우연히 그리고 흔쾌히 동행한 지인과 찾은 첫 번째 도서관에서도 대출중, 도서관 사서의 의뢰로 찾아간 마지막 남은 그곳에 19호실이 있었다.


드디어 <19호실...>앞에 섰다. 문을 열자 수잔 로링즈는 “나는 이것이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로링스 부인의 결혼은 지성에 입각했었기 때문이다.”라고 입을 열었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찰랑거리는 풍족한 일상에도 가라앉곤 하는 치명적 자유에 흔들리는 여자 수잔 로링즈. 그녀에게는 잘 커가는 아이들과 지성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생활과 완벽한 남편이 있다. 교육과 분별력과 판단력을 부여받았고, 자신들의 의지로 함께 행복하고자 자발적으로 결합된 두 사람은 지성이라는 도구로 자신들의 결혼을 검사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은 잘 제어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자주 그녀를 위협하는 알 수 없는 공허함, 그 속에서 수잔은 어디든지 간에 혼자 가서 앉아 있을 수 있는 것, 아무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그러한 방이나 장소를 가지기를 꿈꾼다. 그리고 집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벗어날 그 자유의 시간을 계획한다. 드디어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찾아온 7시간의 자유(학기 동안 주중), 그러나 12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양도된 삶을 살아오면서 매일 단 한순간도 혼자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되는 법을 잊고 있었던 수잔은 매일 매일 더 바쁘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집안일들로 자신을 채웠고, 자유롭지 않기 위한 자발적 속박에 스스로를 밀어 넣게 된다. 결국, 매일 갖는 7시간의 자유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 전혀, 단 1초도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이것저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그녀에게 지각 있는 남편은 집 다락방에 ‘어머니의 방’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아이들과 가정부가 드나들게 되면서 그 방은 또 하나의 거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여행이라는 물리적 자유를 찾기도 하지만 온전히 혼자일 수는 없다.


“수잔은 개 줄처럼 그녀를 의무에 묶어놓은 전화 줄에 매인 채 야생의 산야를 배회하였다. 전화할 차례 혹은 전화를 기다려야 할 차례가 그녀를 그녀의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잔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기를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수잔은 아이들을 위한 오페어 걸을 구하게 되고, 드디어 일주일에 서너 번 낡고 초라한 프레드 호텔 19호실에 자기만의 방을 만든다. 그녀가 호텔에서 하는 일은 글을 쓰거나 와인을 마시는 것도 그렇다고 남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등걸이가 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일, 창을 통해 보이는 자기 자신을 보며 얼마간 마음을 놓아버리는 자신에게 골똘해지는 것이다.

혼자였다.

혼자였다.

혼자였다.

완벽하게 혼자였다.

고요하되 뜨거운 그러면서 두렵기도 한 자유로운 몇 시간. 그저 조용한 것이 아닌 부러 조용한, 다만 혼자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립된 치명적인 자유에 자신을 맡긴 수잔의 일탈. 그러나 그녀의 완벽한 외출은 오래가지 못한다. 남편의 미행이 이어지고 타인의 시선을 받은 그녀의 완벽한 고독은 허물어진다. 수잔은 스스로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 시간이 온통 그녀에게로 흐르는 구름 많은 어느 가을날 마지막으로 프레드의 호텔에 든다. 그녀는 4시간을 오롯이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다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지 않은 침대에 든다. 가스를 켜고 실비아 플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자유 속으로 들어간다. 핏빛 카펫이 깔린 19호실 앞에 나는 서 있다. 수잔은 이 봄과 함께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19실...'을 나오며...


그렇게 수잔을 보내고 <19호실...>을 나오며, 나는 쓰던 글을 멈춘 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단 한 글자도 써내려 갈 수가 없었다. 수잔이 원했던 공허한 자유는 내게 허탈감으로 돌아왔고, 동시에 수잔을 이해하고자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다시 50페이지에 불과한 소설을 한 줄 한 줄 곱씹어 읽어 나갔다. 그러면서 누가 봐도 완벽한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누리면 그만이었을 수잔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19호실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 수잔의 ‘19호실’은 서두에서 언급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결국, 나는 수잔이라는 분신을 만들어낸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신의 영국 여성 소설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을 만나기로 결정, 그녀의 작품들을 찾아 나섰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그녀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곧 그녀의 분신들이다. 초기의 제국주의와 사회적 억압을 다루는 작품 속에는 자신의 유년기를, 그 후 <폭력의 아이들>로 불리는 5부작 시리즈의 <올바를 결혼>(1954)을 필두로 그녀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 <황금 노트북>(1962)과 그 이듬해 쓰여진 <19호실로 가다>와 같은 자전적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된 자신을 투사해 허구화된 모성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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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도리스 레싱의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1950), <폭력의 아이들>로 불리는 5부작의 첫 번째 작품 <마사 퀘스트>(1952),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황금 노트북>(1962) 


레싱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화된 모성은 결혼이라는 제도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억압적 제도인 동시에 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여 여성을 구속한다. 그것은 책임감과 돌봄, 희생의 결정체인 모성을 진정한 여성성으로,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미덕으로 간주한다. 이를 통해 사회는 여성들의 자발적 희생에 최면을 걸어 여성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모성을 스스로 내면화시키게끔 만든다. <19호실로 가다>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강요하는 아니 내면화시킨 허구화된 모성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여성의 내면이 어떻게 분열을 거쳐 파괴에 이르게 되는지 숨이 막히는 언어로 묘사되고 있다. 수잔은 그녀 앞에 나타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상과도 같은 가부장적 모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치열하게 자신의 19호실을 갈망하고 또,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녀에게 19호실은 진정한 해방구는 되지 못했다. 그녀의 19호실은 버지니아 울프가 외쳤던 ‘자기만의 방’과 같이 물리적 자유인 동시에 정신의 자유로 이어졌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건 수잔의 잘못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허상의 내면화 속에서 분열된 자아가 정신의 능동화에 따른 통합된 자유에 이르지 못했을 뿐......



여성의 자발적 글쓰기를 통한 정신의 능동화


버지니아 울프는 콜리지가 언급한 양성적 마음이란 “타인의 마음에 열려 있고, 공명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본래 창조적이고 빛을 발하며 분열되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나아가 콜리지의 양성성 개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정신은 양성적이다. 이 융합 현상이 일어날 때 정신은 완전히 무르익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여자’의 일반적인 호명이기도 한 ‘필자’는 이를 (양성적 마음에 기반한) 자발적 글쓰기와 (양성성 개념에 따른) 정신의 능동화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19호실로 가다>를 시작으로, 그 여정 속에 만난 여러 마주침과 사유의 가지들에 관한 여성의 자발적 글쓰기가 어떻게 분열을 넘어 정신의 능동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프로필이미지

잉여인간

타칭 잉여인간, 자칭 공주(공부하는 주부). 주로 하는 일은 혼자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기’며, 혼자이기를 즐긴다. 고고미술사학은 학부전공으로 끝, 예술학, 미학은 아직도 공부만 하고 있고, 현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호르몬 폭탄을 장착한 사춘기 아들과 수도권 도시 변두리에 살면서 잡독하며 잡글을 쓰고자 하지만, 잉여적 삶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