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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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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에서 만난 그녀들

잉여인간  date. 2018.11.07

도리스 레싱에서 영화 <디 아워스>에 이르기까지



지난 호에서 필자는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19호실을 찾아 나선 힘들고도 지난한 여정 끝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기만의 방』(Room of One's Own, 1929)에 들러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2002)를 다시 봤다. 지난 글쓰기의 연장선상에서 필자는 <디 아워스> 속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19호실을 찾아 울프와 마이클 커닝햄(Michael Cunningham), 앨리스 먼로(Alice Munro), 도리스 레싱을 겹쳐 읽으면서 각각의 작품을 관통하는 여성주의적 인식과 그 발전 과정의 새로운 시각을 쫓아가 보고자 한다.


여성주의 문학의 초석으로 평가받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가운데서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 1925)을 마이클 커닝햄은 『시간들』(The Hours, 1998)1)로 다시 쓰기를 했다. 그리고 커닝햄의 원작을 토대로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는 영화 <디 아워스>를 만든다. 영화는 읽기에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 울프에 도달하기 위하여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축에 놓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면서 울프, 커닝햄, 달드리의 대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을 만들어 낸다 .


커닝햄의 『시간들』은 모더니즘 예술의 정수라고 꼽히는 『댈러웨이 부인』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관계의 차이와 이름의 반복으로 새롭게 변용하면서 울프를 한층 확장시키고 있으며, 울프의 재조명을 가져오는 외연 효과를 발휘한다. 울프의 여러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원작의 문학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과 함께 대중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 채 주로 예술 영화로 분류되어왔다. 그러나 <디 아워스>는 마치 울프의 글쓰기 방식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라가듯이 현란한 편집과 영상, 음악이 인상적이다. 이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여인을 둘러싼 그녀들의 방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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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둘러싼 그녀들


영화에는 세 명의 부인이 등장한다. 1923년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 1951년 그 소설을 읽은 로라 브라운(Laura Brown), 2001년 현대판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클라리사 본(Clarissa Vaughn). 버지니아 울프가 강가에서 자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속의 그녀들은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중심으로 교차되고 반복되는데, 그녀들이 준비하는 파티가 중심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남편의 생일 파티, 남자 친구의 수상 기념 파티, 언니의 방문 파티는 그녀들에게 젠더 역학을 제시한다. 가령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엌은 집에서 여성들이 중심이 되고 여성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부엌에서 주인공들의 포즈는 어색하다. 울프 부인은 가정부에게 준비시킬 메뉴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하며 냉대를 당하고 상심한 채 이 층에 마련된 자신의 작업실로 향한다. 로라는 남편의 생일 아침에도 임신한 것을 핑계로 침대를 지키고 부엌으로 가지 않고 버티고 있고 남편이 덤덤하게 그 공간을 서성거린다. 클라리사의 부엌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호명에 길들여진 모습을 지켜내기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이처럼 부엌이 어색한 그녀들이 집이라는 공간을 나와 서성거리며 숨어들었던 공간을 19호실로 설정해 본다. 19호라는 숫자는 영화의 로라가 숨었던 호텔 방이자 레싱의 소설에서 수잔(Susan Rawlings)이 찾아들었던 호텔 방이다.


울프의 여성주의적 인식의 기반 또한 '방'을 둘러싸고 펼쳐지는데,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주장하고 있는 집안에서의 자신의 방은 사적인 집의 영역인 동시에 문화적으로 구성되었고 공적 영역의 가치와 요구로부터 면제해주는 마법의 공간이 아니라 어느 정도 다른 형태로 그러한 가치와 요구를 확장하는 곳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방이 집 안에 있는 한 기대한 만큼 자율적인 공간이 되지 못한다. 끊임없이 집안의 천사를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 천사를 죽이고 나면 집 안에서의 어머니와 아내라고 호명되는 여성의 자리는 없어지고 자신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남겨질 뿐이다. 이러한 방의 진실에 관하여 영화의 흐름 속에서 울프를 만나게 되고 울프 시대 이후의 여성들의 방에 관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1960년대 미국 중산층을 대변하는 로라는 레싱의 『19호실로 가다』(To the Nineteen, 1963)의 수잔으로, 울프 부인의 방은 주부이자 작가인 내가 찾아가는 앨리스 먼로의 『작업실』(The Office, 1968)로, 클라리사가 리차드의 아내 역할을 자청하며 살아가는 뉴욕거리의 그 방은 런던의 『댈러웨이 부인』 집(방)으로 확장시켜 읽어볼 수 있다. 그녀들의 방들을 지나오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리차드의 죽음을 애도하며 모인 방에 다다른다. 클라리사, 샐리, 그녀들의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방문객 로라의 삶이 연속될 방은 가족을 재구성하고 가부장제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시각화되어 자리를 잡는다. 방은 이제 젠더 문제를 전복시키며 새로운 그녀들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문제적인 공간으로서, 그녀들을 둘러싼 방은 감금과 억압의 공간에서 서서히 탈주의 공간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 브라운 부인 /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영화 속의 로라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채 자아와 정체성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녀의 일탈은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한 사람의 마누라인 체하느라 이곳에 이렇게 영원히 갇혀 지내는” 그녀는 마치 무대에서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 의상을 걸치고 연습은 충실히 하지 않은 채로 무대에 올라 연극 공연을 펼치려는 것처럼 젠더 이데올로기의 덫에 갇혀 방황을 거듭한다. 로라는 제대로 숨쉬기도 힘든 억압과 감금의 공간이었던 집에서 자유롭고 절박하게 자신에게 부과된 일체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남편의 생일에 하루만의 일탈을 감행한다. 어린 아들을 혼자 두고 정신없이 차를 몰아 집으로부터 멀어져 호텔로 무작정 들어간다.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스스로 구원되었다고 느끼는 자신만의 온전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런데, 19호실에서 수잔이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망하게 혼자 앉아있기를 거듭한 반면, 로라는 그 방에서 책을 펼쳐 읽으며 울프의 삶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연속적으로 읽어내는 해방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로라는 공고하게 자신을 둘러싼 집을 나서게 되고 이국에서 도서관 사서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레싱이 제시하는 방은 정신적인 성숙이나 치유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여성의 감금과 한계를 대변하는 부정적인 상징물로 장치되어 19호실은 죽음의 장소로 치닫는다. 지각 있는 가정의 안주인이었던 수잔이 집안에서 자신을 옭아매는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처음에는 가족의 동의를 얻어 집 안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의 그 공간은 여전히 나의 역할을 기대하는 곳이었고 나만의 방에 고스란히 감금당하는 꼴이 되고 만다. 완전한 혼자로 앉아 있을 수 있는 방을 꿈꾸며 미스 타운젠트의 호텔로 향했지만, 자신을 집에서와 똑같이 의무에 묶어놓는 전화 줄에 매인 채 낙심하기를 반복한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위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점점 그녀만의 19호실로 찾아 나서는 욕망은 커진다. 이어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주급으로 요금을 치르고 프레드의 호텔로 숨어들게 되지만 남편이 결국 그녀를 찾아내고 만다. 그녀는 “세상이 그녀를 찾아냈다.”는 발가벗긴 처지에 놓인 채 예정되지 않은 시간에 집으로 향했고 그 집에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창문 너머에서 깨닫는다. “이미 이 모든 것의 밖에” 있게 된 자신은 그 집의 방문객으로, 집은 완전히 낯선 공간이 되어버렸다. 결국 남편과의 믿음도 깨지고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는 집이 없어지자 19호실로 영원히 숨어들기로 마음을 먹는다.


19호실을 둘러싼 젠더 역학을 다양하게 검토할 수 있는 두 인물의 일탈은 다르지만 비슷한 면도 있다. 로라는 19호실을 걸어 나왔지만 다시 안전하게 집에 안착하지 않는다. 이 점은 19호실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수잔의 행보와도 맞닿아있다.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그녀들은 19호실을 택했다. 수잔의 경우 결국에는 19호실조차 지옥이자 죽음 자체로 만들어버렸지만 이를 순전히 현실의 도피와 실패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수잔이 비록 그 방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나 자본주의 체제의 결혼 현실의 실패를 정확히 간파하고 자율적인 공간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는 데서 여성주의적인 인식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19호실에서의 죽음은 실패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통해 극복하기 힘든 현실과 맞선 자율성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로라는 19호실에서 만삭의 배를 드러내며 읽고 싶던 책을 펼쳐 들고 완전한 자신과의 일체감과 존재감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내면을 회복하고자 한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자신을 덮치는 감상에 빠져 갑자기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화 속의 장면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로라가 삶을 선택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영화의 장면을 가로지르는 강물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감옥 같았던 집에서 탈주하는 그녀들의 19호실의 탈환을 예고한다. 울프 부인이 걸어 들어가는 강물과 로라를 엄습하던 강의 표류 장면, 또한 수잔이 19호실에서 “가스의 약하고 부드러운 쉬익 소리를, 어두운 강 속으로 표류해가며 듣고 있었다”는 세 개의 장면을 겹쳐 읽으면서 방의 공간적인 의미와 현실에서 강제되는 방을 둘러싼 젠더의 역학 문제를 생각해 본다.



# 울프 부인 / 앨리스 먼로 『작업실』


영화 속의 버지니아 울프를 대변하는 울프 부인은 정신이 심약하고 예민하여 집에서는 안주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작가로서 그녀의 작업은 “스푼 위에 위태롭게 얹힌 계란처럼 그토록 무너지기 쉬운 충동”이며 능숙하게 부엌을 점령하고 요리를 하는 가정부를 지켜보며 작가는 “어머니의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지켜보고 있는 소녀”같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작게 느껴진다. 일상의 사소한 마찰과 어려움을 뒤로하고 “훌륭한 하루를 보장받기 위하여” 죄의식을 느끼면서 발소리를 죽이고 위층 자기만의 작업실로 향하는 그녀는 펜을 집어 들지만 “자신은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점을, 실내복을 입은 채 펜을 잡은, 약간의 능력만 갖추었을 뿐 두려워하고 확신이 없는, 어디서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쓸 것인지조차 전혀 아이디어가 없는 그런 여자”라고 자책한다.


글 쓰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여성 작가로서의 소명의식과 젠더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먼로의 소설 『작업실』2)과 연관해서 읽을 수 있다. 먼로의 『작업실』에서 ‘나’는 “셔츠를 다리다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하는 일을 감행한다. 작가인 나는 글쓰기를 위해 지극히 개인적이고 공적인 장소를 구하는 문제를 뻔뻔해져야하는 일로 스스로 점검하고 있다. “작가다, 글을 쓴다, 습작을 한다. 나는 도무지 자신 있게 나의 공적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작가이면서도 당당하게 글을 쓴다고 하지 못하고 겸손을 가장한 위선”으로 무장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울프의 언급대로 “글을 쓰는 데는 타자기, 여의치 않을 경우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에 책상과 의자가 있으면 그만”이지만, 작가인 나는 공적인 공간으로 쓸 작업실을 욕심내고 있다. 집이라는 공간이 여자와 남자에게 각각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에 여성은 집에서 공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작업실을 임대하여 자신만의 소박한 공간을 갖게 된다.


단편소설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먼로는 짧은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 것이 젠더와 연관되어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단편 소설이라는 장르는 여성이 집안에서 그나마 글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자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울프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가벼운 글쓰기부터 시작하라고 주문한 데서 먼로의 단편 이야기 창작을 연결시킬 수 있으며, 울프가 제시한 방은 먼로에게 있어 단편 소설이라는 장르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울프 부인이 집안에서 젠더라는 관습에 피폐해졌고 먼로는 이제 젠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고자 공적인 작업실을 얻기에 이르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그 공간은 젠더의 역학이 작용하는 위태로운 곳이다. 따라서 울프의 집 안의 자기만의 방과 먼로의 집 밖의 작업실은 공유되는 지점도 있지만, 작가로서의 여성의 입지와 인식이 진일보했음을 아울러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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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사 본 / 버지이나 울프 『댈러웨이 부인』


커닝햄은 『댈러웨이 부인』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내어 차이와 반복을 통한 새로운 관계망을 제시한다. 특히 젠더에 관한 작가의 비판적인 인식을 클라리사라는 인물을 통해 제시한다. 그녀는 리차드를 돌보고 그의 아내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가 지어준 댈러웨이 부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있다. 가령 눈앞에 펼쳐질 리차드의 작가로서의 수상 기념 파티가 클라리사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클라리사의 자화상은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서 어릴 적 남자 친구 피터의 눈에 비치는 완벽한 안주인으로서의 댈러웨이 부인과 겹쳐진다. 사회적인 지위와 사교나 세속적인 성공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여자이고 "남편보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남편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아야만 했다. 이것이 결혼 생활의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항상 남편을 인용하는 여자. ... 그녀가 벌이는 파티는 모두가 그녀의 남편, 그녀가 생각하는 그를 위한 파티일 뿐인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바로 리차드를 돌보는 일에 자족하고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호명에 만족하는 1990년대를 살아가는 클라리사의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클라리사는 리차드의 죽음 앞에서 “댈러웨이 부인으로 호명되는 삶에 대해 얼마나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 고백하고 싶었던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깨닫는다. 이는 영화에서 리차드가 클라리사에게 너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마지막 주문을 하면서 클라리사의 눈앞에서 자살하는 장면에서 예고된다. 비혼모로 딸을 두고 있고 동성 연인과 동거하면서도 리차드의 아내 역할을 수행해왔던 자신을 이제는 떠나보내야 하는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로운 또 다른 시간과 맞서야 하는 순간에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을 테니 집을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리차드의 어머니, 로라의 고백을 듣고 연인과 깊은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면서 결연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영화 속 네 명의 여성들이 리차드의 장례식을 위해 하룻밤 묵게 되는 집은 가부장제의 전복과 교란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변모해간다. 이들이 함께 잠이 들 그 방은 가족을 재구성하여 젠더를 뒤집거나 무위 시키는 전략으로 커닝햄이 마련한 것이며 영화는 클라리사가 커튼을 내리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읽어낸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삶이었고 그것이 파티를 여는 이유였던 댈러웨이 부인처럼 클라리사 역시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껴안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며,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살아내고자 한다. 수많은 클라리사와 로라가 모여드는 그 방에서 여성적인 인식의 문제는 견고하게 변모해 나갈 것임을 영화와 소설은 긴밀하게 소통하며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의 삶에서 투쟁이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울프 부인의 자조 섞인 대사처럼 그녀들은 방을 둘러싼 수많은 제도들과 투쟁 하면서 현재에 살고 있는 것이다.



19호실을 나오다.


그녀들의 19호실은 댈러웨이 부인이 세계대전의 전운이 휩쓸고 간 죽음의 세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생에 대한 기운을 찾아가듯이 삶을 긍정하는 출발점으로 은유 된다. 삶과의 투쟁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던 그녀들의 절규를 들으면서 필자는 19호실로 들어간 그녀들을 둘러싼 죽음을 애도하며, 필자는 이제 그녀들의 19호실을 나가고자 한다.


울프가 주창한 여성주의적인 인식은 레싱에 이르게 되면 서구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와 관습을 실패로 규정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탐색하게 된다. 울프 부인과 먼로에게서는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경험이 맞물리면서 글쓰기와 젠더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장 이해받기 힘든 여성(모성을 포기한 채 집을 나간 어머니)으로 평가받을 로라의 경우, 수잔과 마찬가지로 모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인식하게 되지만. 그녀의 삶은 모성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찾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수잔이 집을 걸어 나와 숨어 들어간 19호실의 방은 보여주고 있다. 클라리사와 샐리 커플은 가부장제의 젠더 문제를 전복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가족의 재정의가 실천되고 연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울프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개진한 이후로 로라와 수잔, 작가인 먼로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그 방은 유효한 정치적 장소로 남아있다. 따라서 노정에 있는 그녀들의 방은 정체된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내어 삶의 희열이 가득 찰 공간으로 변모해갈 것이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쓰면서 100년 후인 2028년쯤에는 여성이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장벽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 상상했다. 그로부터 90년이 흐른 지금 여성은 다양한 영역에서 남성과 대등한 기회를 얻고 있고, 사회 각 분야에서 ‘금녀의 벽’도 무너지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 닷컴’은 ‘미투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 다시 읽기’라는 기사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상상한 남녀평등 시대의 마감 시한까지 10년이 남아 있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했다. 한편, 지난해 미국에서 시작돼 최근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는 완전한 양성평등의 세상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절반이 평등한 세상은 아직도 멀기만 하단 말인가.....




1) 한국어 번역본은 『세월』로 확인됨.

2) 한국어 번역본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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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타칭 잉여인간, 자칭 공주(공부하는 주부). 주로 하는 일은 혼자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기’며, 혼자이기를 즐긴다. 고고미술사학은 학부전공으로 끝, 예술학, 미학은 아직도 공부만 하고 있고, 현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호르몬 폭탄을 장착한 사춘기 아들과 수도권 도시 변두리에 살면서 잡독하며 잡글을 쓰고자 하지만, 잉여적 삶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