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공동체와 예술

HOME - 500g - 공동체와 예술

4호
{공동체와 예술}
함께 거주하기. 그리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들

최창희 _ 감성정책연구소장  date. 2018.11.07

뮌스터조각프로젝트 ③



많은 SF 영화에서 회색빛 도시의 미래를 그린다. 디스토피아, 파괴된 도시와 그 속에서의 인간. 처참한 이미지는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986년의 체르노빌과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그리고 시리아 내전, 그리고 난민……. 셀 수도 없이 많은 사건과 도시의 이미지들은 SF 영화의 미래의 한 장면이 아닌 우리의 현재이다. 그래서 그런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After ALife Ahead>는 더욱 울림이 있다. 뮌스터 서북부에 위치한 폐장한 아이스링크는 지구 종말 이후의 어느 순간의 모습이다. 파괴된 도시 어디쯤, 새어 들어오는 빛에 기대어 여기저기 꺼진 바닥 사이사이로 조심조심 탐험을 시작해 본다. 바닥은 거대하게 파괴되었고 콘크리트 바닥 밑으로 거친 땅조차도 움푹움푹 패여 있다. 곳곳에 물웅덩이도 있다. 한참을 탐험하니 생명의 초록이 보인다. 폐기물로만 가득한 쓰레기 행성이 된 지구에서 끝까지 자기 임무를 지키던 '월-E'가 발견한 초록색 식물처럼 모든 것이 다 파괴된 어느 먼 미래에 시작된 생명체들. 위그는 2016년에 폐장한 아이스링크를 해체하고 재구축하여 작가가 실험해온 바이오아트를 펼쳐 보였다. 작가의 실험은 확장되어 인간 중심의 도시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 사는 이 도시, 이 지구는 인간의 것의 아님을, 인간이 사라져도 이 지구는 다시 스스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일까?


최창희1.PNG


Pierre Huyghe, <After ALife Ahead>, 2017


2017 뮌스터조각프로젝트가 제시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신체의 문제를 카스퍼 쾨니히를 비롯한 기획자들은 “파괴와 지속”의 문제로 연결 짓는다. 이 지구는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그리고 ‘합리적 이성’과 과학으로 인해, 이기적 존재자인 인간에 의해. 이러한 지구가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이제야) 다소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21세기의 인간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살아가고 있으며, 심지어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어도 다른 생명체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듯, 또는 ‘함께 사는 것’에 대한 방법을 모르는 듯 행동한다.


최창희2.PNG


CAMP (Shaina Anand, Ashok Sukumaran), <Matrix>, 2017

photograph: Henning Rogge ©뮌스터조각프로젝트


그러한 우리의 삶에 뮌스터의 예술가들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인도 출신 예술가로 구성된 그룹 CAMP는 피에르 위그와 같은 키워드를 제시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뮌스터 극장의 잔해와 ‘다시 건축된’ 극장을 검은 전선으로 연결한 작품 <Matrix>는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와 민주주의 문제까지 소환한다. 작품은 인간 이성의 오만으로 파괴된 도시, 그리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할 줄 알았던 투명한 유리 파사드, 수평적으로 관계망을 짓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여전히 층위를 달리하는 수직적 “참여”라는 한계적 민주주의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관람객은 파괴된 옛 극장과 새로 지어진 유리 파사드를 연결하는 수평적 전선에 수직으로 내려온 버튼을 작동시키는 참여자일 뿐이다.


최창희3.PNG


좌. Aram Barthell, <5 V>, wood, steel, thermoelectric generator, cables, electronics etc. Installation view 2017, photograph: Henning Rogge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우. Koki Tanaka, <Provisional Studies: Workshop #7 How to Live Together and Sharing the Unknown>, 2017

Action and workshpos, Installations of the video documentation in four rooms

Installation view 2017, photograph: Henning Rogge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앞서 두 작품이 ‘파괴’에 초점하여 ‘지속’의 문제를 제기하였다면 아람 바르톨(Aram Bartholl), 코기 타나카(Koki Tanaka)의 작품은 ‘지속’에 초점하여 함께 살기 방법을 숙고하게 한다. 바르톨의 <3V>, <5V>, <12V>는 우리가 매우 쉽게 사용하고 있는 전력의 극소량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열에너지가 필요한지 경험하게 한다. 또한 ①편에서 간단히 소개하기도 하였던 코기 타나카의 작품은 롤랑 바르트의 책 제목을 차용해 “함께 살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9일간의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전쟁 시 요리법, 핵 벙커에서의 운동, 시리아 문제의 전문가와의 인터뷰 등도 진행하면서 위기의 상황이나 일상적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논쟁적 상황 등을 다루면서 그야말로 함께 살기에 대한 실천적 예술작품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파괴되고 다시 재구축되는 도시 속에서의 ‘함께 살기’의 방법을 탐구하고 모색하는 예술적 실험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실험 중에 보다 더 실천적인 두 작품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라라 파바레토(Lara Favaretto)의 작품의 외형은 미니멀리즘의 조각이다. 이 기념비적 조각작품은 특이한 것이 전시가 완료되면 파괴되고 소멸된다. 여기서 완전히 다른 맥락이 존재하는데 지금까지의 파괴가 ‘인간의 폭력성’에 의한 것이었다면 작가의 작품은 공존과 지속을 위한 파괴의 의미를 지닌다. 이 전형적인 모더니즘 석조작품은 가까이에 다가서면 돈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볼 수 있다. 전시가 완료되면 작품은 부서지고, 그 돌덩이는 재사용되며, 모금된 돈은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예술가는 이번 모금액은 강제추방된 난민들을 돕는 자선단체인 'Hilfe für Menschen in Abschiebehaft Büren e.V.'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은 2017 유럽그랜드아트투어에서 주요하게 논의된 난민 문제를 매우 실천적인 예술 형식으로 제시하였다.


최창희4.PNG


Lara Favaretto, <Momentary Monument — The Stone>, Installation view 2017, photograph: Henning Rogge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최창희5.PNG


Jeremy Deller, <Speak to the Earth and It Will Tell You (2007 – 2017)>, 2007-2017

photograph: Henning Rogge ©뮌스터조각프로젝트


그리고 뮌스터조각프로젝트와 함께 10년을 기다려온 작품이 있다. 다름 아닌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의 <Speak to the Earth and It Will Tell You (2007-2017)>이다. 2007년에 시작된 프로젝트는 다음 개최년도인 2017년까지 지속해온 과학적이고, 문화 인류학적 연구에 기반한 예술적 실험 작품이다. 작가는 50가구의 시민농장협의회를 지속적으로 만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시민농장의 각 가구마다 10년 동안 프로젝트 과정을 기록하기를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가 30권의 아카이브로 정리되어서 관람객에게 공개되었다. 관람객은 시민농장 한켠의 오두막이나 벤치에서 약 30가지의 10년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식물이 자라고 계절이 바뀌며, 뛰어놀던 꼬마 어린이도 함께 성장해가는 모습까지 발견하는 즐거움도 선사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보다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건이다. 10년의 과정 동안 시민농장은 기능적으로 많은 것이 변하였는데, 그들은 노동자 계층이나 저소득층과 나누기 위하여 과일이나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농장 내에서도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을 논의하고 개인 간 분쟁 등을 조절하기 위한 규정 등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공유를 실천하고 있었다.


2017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이 시대에 진정한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다룬다. 역사와 도시, 지구와 미래 등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된 인간 신체에서 오히려 소외된 인간과 상실된 공동체의 문제를 숙고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조각이라는 예술의 형식을 넘어서 공공예술, 나아가 예술을 통한 다양한 실험이 펼쳐졌다. 공공 공간에 놓인 예술작품은 조각을 넘어, 그리고 공공예술을 넘는 지평을 형성하고 있다. 10년에 한 번 개최되는 프로젝트여서 매회 제기되는 이슈는 10년의 숙고를 담고 있다. 오랜 시간 깊이 있는 고민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함께 살기’의 문제이다. 대표적인 공공예술프로젝트로서 손꼽히는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공공예술에서의 선도적 역할을 했듯이, ‘공공’에서 확장된, 또는 이전된 ‘공동체’로서의 커뮤니티 아트의 논의를 사유한다. 그리고 그 사유의 방법에는 매우 긴 호흡이 있어왔다. 77년, 87년, 97년, 07년 계속 진행되었던 마이클 애셔(Michael Asher)의 <Double Check>, 77년 설계한 작품을 영구 설치하기 위해 30년 동안 준비해온 부르스 나우만(Bruce Nauman)의 <Square Depression>. 이러한 과정을 알게 되었을 때 도시를 사유하는 시간의 깊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렇게 긴 호흡의 프로젝트가 가능할까? 10년 동안 하나의 예술작품이 계속 진행되고, 매회 같은 작가의 작품을 초청하고, 심지어 30년에 걸쳐 작품 설치를 준비하는 등의 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10년 주기의 프로젝트를 지속하여 개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개최하는 회마다 동일한 예술감독을 선임하고, 그에게 신뢰하고 맡길 수 있는 시스템이 한국에서 가능한 것인가?


2006년에 시작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아트인시티> 공공예술프로젝트는 2년의 시범사업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참여정부에서 MB 정권으로 이행되면서 2009년 <마을미술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되어 여전히 전국을 대상으로 추진되고 있다. 서울시 <도시갤러리> 사업도 2007년에 시작되어 3년 정도 활발히 진행되다 그 사업도 멈추어버렸다. 각각의 사업은 우리 사회에 공공미술에 대한 많은 논의를 제기해 주었지만, 결코 긴 호흡과 오랜 숙고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참여하는 예술가들도 기획자들도 다소 서툴기도 하였지만, 절대적으로 우리의 행정기관은 1년도 기다릴 수 없는 조직이었다. 1년의 회계연도도 버거웠으며, 조금도 실험적이고 모험적이기를 기대하지를 않는다. 심지어 도전적(?)이기까지 하면 정해진 임기도 채우지도 못할 위험도 처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 21세기 IT 강국이라는 사회에서 버젓이 예술을 검열하고 블랙리스트까지 작성한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올해 초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발전방향 토론회 사회를 맡았었다. 2005년에 시작한 공공예술프로젝트는 기초지자체의 독립적인 의지로 현재까지 3년 주기로 계속 개최되고 있다. 토론회는 이러한 의의와 한계를 평가하고 논의하면서 발전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으며, 기초지자체가 지속적으로 공공예술프로젝트를 개최하는 것에 대한 의의에 대한 논의와 함께 3년 주기의 행사임에도 준비 기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는 한계, 공공예술이 자주 직면하는 문제 등이 어김없이 제기되었다. 짧은 준비기간으로 지역을 충분히 사고하지 못하고 기존의 문제점 등이 반복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토론회에 참여한 지역 주민 몇 분의 의견이었다. “지역의 시민으로서 여러 가지 건의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거의 반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시민들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를 알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적으로 찾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발언은 기억에서 잊히질 않는다.


한국에서 진행된 많은 공공예술프로젝트 등의 의의도 많다. 그러나 한계 역시 너무나 많다. 뮌스터조각프로젝트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비슷할까? 그럼에도 한국의 공공예술을 공무원예술, 행정예술이라고 비난에 가까운 평가가 제기되는 것을 보면 지속가능한 삶, 이를 위한 실천으로서의 공동체 예술에 대한 기대는 언감생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토론회에서 시민의 발언은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프로필이미지

최창희 _ 감성정책연구소장

'문화예술공동체를 위한 감성정책연구소'를 운영. 그러나 박사논문 작성 핑계로 모든게 엉망진창이다. 빨간씨는 대학 시절 혁명을 꿈꾸며 사용했던 필명 주해(朱海)에서 파생된 닉네임.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서 예술적 방법을 탐구하며, 돈보다 멋진 것을 추구하고 싶은 낭만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