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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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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공동체와 예술}
공공미술에서 장소 특정성,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의 의미

최창희 _ 감성정책연구소 소장  date. 2018.11.07

공공미술과 거의 짝이 되어 붙어 다니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장소 특정성이다. ‘site-specific’(장소 특정적)이라는 말을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이 장소 특정성은 이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그리고 공공미술 논의를 뜨겁게 달군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리처드 세라 Richard Sera의 <기울어진 호 Tiled Arc>의 철거 논쟁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리라. 미국 연방 조달청의 의뢰를 받아 설치된 이 작품은 뉴욕 연방 청사 광장을 3.6m의 높이의 녹슨 철(코르텐스틸) 36m가 가로지르며 세워졌으나, 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은 자유로운 보행에 방해가 되며 마약 거래 등 범죄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호소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이 시야를 방해하고 움직임을 제지함으로써 연방정부 등의 ‘권력’을 경험케 하려는 것이 바로 작품의 의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 장소에서 바로 제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에 “작품의 이전은 곧 작품의 파괴”라며 장소 특정성의 이유로 철거 및 이전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꽤 오랜 논쟁 끝에 이전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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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Serra, , Federal Plaza, 1981-1989  365.7 x 3657.6 x 30.45 cm

Photo : Anne Chauvet © Richard Serra


삼척동자도 알만한 이 사건을 왜 언급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철거 논의는 공공미술에서 여러 논의를 발생시켰다. 장소 특정성의 의미로서 함께 제기된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장소에 놓이는 작품의 ‘공공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에서는 자율성과 공공성이 상반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장소 특정적이라는 개념에서 ‘장소’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특정적’이라는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보다 주요하게 제기하고 싶은 것인데, 이러한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논제를 제기하는 이 작품의 철거 논쟁은 여전히 공공미술 논의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상호 연관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먼저 장소 특정성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이 장소 특정성은 ‘모더니스트 패러다임’ 1) 논의와도 연관된다. 즉 그린버그가 ‘매체 그 자체’를 선언하고 예술이 예술 외적인 것에서부터 독립하여 예술 그 자체로서의 ‘자율성’, ‘순수성’을 주장하며, 나아가 추상예술의 그 난해함이 도가 넘었을 때에 일각에서는 ‘순수예술 지상주의’라는 비판을 넘어 비난까지 쏟아져 나왔다. 순수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발의 한 양상으로 예술 스스로가 제 발로 화이트 큐브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바로 공공미술이다. 여기서 구분하여야 할 것은 미술관 안에서 전시하였던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와 아무 상관없이 미술관 밖으로 똑떨어져 나왔다는 의미에서 ‘플롭 아트 Plop Art’와는 다른 공공미술이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장소 특정성’ 개념이 표명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버트 배리 Robert Barry라는 예술가는 자신의 전선 설치 작업들이 “모두 설치 장소에 맞도록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을 부수지 않고는 옮길 수 없다”고 1960년대 후반에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대략 20여 년이 지나 리처드 세라도 자신의 작품 철거 논쟁에 대하여 동일하게 주장한다. “작품이 그 장소를 위해 고안되고, 그 장소에 설치되며, 그러므로 그 장소에 통합된 한 부분으로 존재하면서 그 장소의 성격을 변경시킨다. 그것을 떼어내는 것은 작품이 존재하기를 멈추게 하는 것과 같다.” 20여 년의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로버트 배리의 주장은 옳고 리처드 세라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된 것은? 그의 작품이 수용 불가능하게 된 것은 20여 년의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착오적 발상 때문이었을까? 물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초기 실험적 의미가 퇴색되고 한물간 것이 될 수도 있다. 로버트 배리의 작품은 대지 미술, 과정 미술,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미학적 실험들의 초기 단계로서 전위적인 조각에서의 급진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났다고 그 급진성이 쇠락하여 작품의 철거하자는 논의가 성립될 수는 없다. 여기에 바로 ‘장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한다. 세라는 뉴욕 연방정부 ‘앞’에 설치될 작품을 통해 공간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즉 작품 <기울어진 호>를 통해 “대중을 억압하고 위협하며 시야를 방해함으로써, 움직임을 제지하고 차단의 감정을 촉발”시킴으로써 연방 정부의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경험시키고 억압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작가는 장소에 대한 숙고에서 작품의 설치 공간이 연방 청사 ‘앞’이라는 것만 고려하였지 이곳이 ‘광장’이라는 것을 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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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left- James Ackerman, right - Susan Swider ©Richard Serra


앞서 언급하였듯이 작품의 철거 논쟁에서 작품의 소유권도 함께 쟁점이 되었다. 바로 작품의 설치와 철거, 그리고 이전 등의 권한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권한이 작품을 제작한 작가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작품 제작을 의뢰하고 제작비와 설치비를 제공한 연방정부에게 있는 것인지, 이것도 아니면 설치된 그 공공장소를 이용하고 있는 공중(시민)의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간단하게 누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작품은 공공시설청의 ‘건축 속의 미술’(Art in Architecture) 2) 프로그램에 의해 설치되었고 연방정부가 의뢰하였기 당연히 작품의 설치 등에 관한 세부적인 책임과 권한은 설치 계약에 명시하였을 것이고 또한 관련한 법률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작가는 ‘광장’이라는 장소를 망각하였고, 더더욱 광장의 주체를 전혀 숙고하지 못하였다. 바로 장소에서의 ‘주체’의 문제를 상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더하여 논의를 전개하겠다. 바로 예술의 자율성의 문제인데, 글의 앞부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공공미술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은 상충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두 사상가를 불러오고자 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과 자끄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테제를 설명하였다. 바로 매체에 따라 지각방식 또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각방식의 변화로서 대중은 단순히 관람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비평가의 지위를 지닐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바로 사진, 영화라는 매체가 집단적 관람의 방식과 다양한 매체의 속성을 통해 대중의 지위를 올려놓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통해 작품은 이전의 ‘제의적 가치’가 아닌 ‘전시 가치’가 주요하게 대두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관람자는 더 이상 예술작품에 대하여 ‘숭배적’ 태도가 아닌 ‘비판적 거리두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와 연결하여 공공미술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역시 작품이 놓여지는 ‘장소’를 바꿈으로 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관람자 역시 과거의 수동적 태도가 아닌 ‘비판적’ 태도를 득하였고, 나아가 장소의 주체로서 그 장소의 ‘작품’에 대하여 ‘주체’의 지위를 스스로 수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리처드 세라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공공미술 작품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층 더 나아가 작품의 놓이는 위치는 예술이자 예술이 아닌 것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즉 예술 작품이 놓이는 장소가 미술관이 아닌 일상 공간이기에 작품은 작품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이러한 논의는 랑시에르의 매체론이자 예술론과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있는데, 그는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매체의 개념 3) 과 ‘매체 그 자체’ 4) 라는 개념을 넘어 제3의 ‘환경으로서의 매체’ 개념으로 예술의 의미를 내어놓고 나아가 “예술은 예술이면서 동시에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이다”라고 언급한다. 5) 흥미로운 것은 ‘장소 특정성’ 개념이 제기된 초기 논의에서 비슷한 의미가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장소 특정적 미술은 훼방을 놓든 동화되는 주변 환경의 맥락에 의해 형식적으로 규정되거나 방향성이 유도되는 식으로 그 환경의 일부가 된다는 것. 6) 훼방을 놓거나 동화되는 방식은 그 환경의 일부이면서 일부가 아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정한 공공미술, 나아가 예술이라면 그것이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닐 때, 하나의 도구와 수단이면서 매체 그 자체로서 예술일 때에, 즉 그 ‘환경으로서 매체’로서 기능할 때 가능할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공공미술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이 상반된 것이 아니다.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예술의 자율성으로서 철거 반대를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장소 특정성 자체도 이해하지 못한 것, 바로 더글라스 크림프가 비판한 바와 같이 예술의 자율성과 순수성에 대한 모더니즘 신화 그 내부에서 스스로 무덤을 판 행위가 되어 버렸다.


공공미술 작품은 공공연히 도마 위에 오른다. 그럴 때마다 예술의 자율성이 희생된 것인 양 작가와 일부 비평가들이 변을 늘어놓는다. 공공미술 논쟁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기울어진 호>가 철거된 지도 거의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것보다 보다 더 명료히 환경에 놓이는 작품으로서의 장소 특수성에 대한 논의가 반세기 전에 있었다. 그리고 보다 오래 전 1936년에 이미 벤야민은 전통적 가치가 청산되고 예술의 가상이 사라졌음을 이야기하였다. 예술의 자율성 논의를 쉽게 압축할 수는 없지만 반복되는 논란은 우스운 일이 아닐까?


공공미술작품에서만 예술의 자율성이 터부 되고 공공성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반성하시라. 장소에 대한 오독이 예술성으로 가장될 수는 없다. 그 장소의 ‘공공’이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예술성의 상반된 개념으로 대중성을 제기하며 대중에게 외면받은 예술로 자위하기도 한다. 대중을 얕보는 태도이다. 오랜 기간 ‘좋은’ 작품으로 사랑받는 작품의 평가자가 바로 대중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울어진 호>는 정부의 권력을 가시화하고자 하며 대중을 그 권력의 힘을 경험하게 하려 했으나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주객이 전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의 주체를 상기하지를 못한 것이다. 그 권력을 ‘권력’으로 보여주고자 하였으니 대중은 그 ‘권력’에 맞선 것이다. 장소에 특정한 작품은 그 장소의 역사적, 지리적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고 또한 현재의 그 장소의 주체를 사유해야 한다. 공공을 이해하지 못한 공공미술은 작품으로서 예술성도 갖추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일이다. 최근에 벌어진 국내 이화동 벽화 사건이나 ‘7017 서울로’ 개장을 기념으로 설치된 공공조형물 <슈즈 트리>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그 장소와 함께 그 장소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 어떤 예술의 자율성도 설득될 수 없다.




1)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보다 광범위해졌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유행처럼 다소 사라졌다. 철학과 미학 내에서도 모더니즘을 새로이 논의하고 있다. 여하튼 그린버그식의 모더니즘 논의는 그의 텍스트 ‘모더니스트 페인팅 Modernist Painting’에 의거하여 모더니스트 회화, 모더니스트 조각, 모더니스트 패러다임 등으로 언급한다.

2) 우리나라의 건축물미술작품 설치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건축비의 0.5%를 작품을 설치하도록 하는 공공미술제도이다.

3) 이것은 매체가 단순히 도구와 수단이기도 한 것이기도 하며, 따라서 테크네 techne 인 기술이 예술이 되지 못하고 그저 기술로만 존재하는 것을 내포한다.

4) ‘매체 그 자체’는 앞서서도 설명하였듯이 그린버그의 매체론이자, 예술론이다. 즉 예술이 매체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예술 고유의 특성을 획득한다고 설명한다.

5) Jacques Rancière, “What mediaum can mean”, Parrhesia No.11, 2011. pp.35~36.

6) 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현실문화, 201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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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희 _ 감성정책연구소 소장

'문화예술공동체를 위한 감성정책연구소'를 운영. 그러나 박사논문 작성 핑계로 모든게 엉망진창이다. 빨간씨는 대학 시절 혁명을 꿈꾸며 사용했던 필명 주해(朱海)에서 파생된 닉네임.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서 예술적 방법을 탐구하며, 돈보다 멋진 것을 추구하고 싶은 낭만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