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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옛 그림과 동시대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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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즐거운 옛 그림과 동시대 미술}
동시대 미술에서 전통의 현대성

박재은_자유기고가  date. 2019.10.26

주체성과 미술 


우리나라는 근대기에 서구문물의 수용과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민족적 숙명으로 말미암아 주체성과 민족고유의 정체성에 일종의 위협과 진통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서구문물은 주체적인 차원에서 수용되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 민족 고유의 가치관이나 전통은 그동안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지 못했던 부분이 상당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소암 이동식 1) (1920-2014)은 민족 주체성 약화의 원인에 대하여 “李朝(이조) 때는 주로 중국에 대해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强占(점거)한 후로는 일본과 서양에 대해서 심한 패배 의식 내지 패배 감정을 갖게 되어 이것이 우리 내부의 敵(적)으로 작용하여 진정한 主體性(주체성)과 근대화를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2) 라고 주장한다. 


미술에서는 1910년대에 고희동 3) 이 최초의 서양화가로 서구회화를 우리 화단에 들여왔고,  이후 김관호 4) , 나혜석 5) 등을 필두로 서양화단은 생성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 미술의 특색에 대해 향토색이라는 요소를 내세워 우리 미술을 정의하려 하였고, 야나기 무네요시 6) 역시 우리의 미술을 비애의 미와 무작위의 미라는 특징을 내세워 정체성을 왜곡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7) 1930년대 후반에 윤희순 8) (1903-1947)의 미술관은 화훼의 상징성을 되살리는 것으로 전통화의 구성을 갖추게 되지만, 그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화훼에서 상징성이 중요시되었던 가치관을 버리고, 사실적 표현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다. 9) 산수화에서도 전통의 시대적인 변화는 목격된다. 변관식 10) 의 경우 산수를 현대적인 의미의 풍경으로 바라봤고, 그것은 낭만주의 이래의 서구 예술의 이념을 수용한 결과물로 해석된다. 11)


서구의 가치관이 우리의 정신에 녹아들기 전에 우리에게는 고유의 가치관이나 자연관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우리의 고유의 가치관은 낡은 것, 쇠락한 것으로 도태되었다. 해방 전후에 그려진 정물화를 보면 우리의 고유의 자연관이 삶의 뒤켠으로 밀려난 것을 볼 수 있다. 해방 전후에 박득순 12) , 도상봉 등을 선두로 정물화가 많이 그려졌다. 꽃이나 식물들을 소담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린 이 그림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인간소유의 개념으로 탈바꿈한다. 탐미적이고, 유혹적인 이 그림들은 서구에서 자연을 소유하려는 인간중심적인 가치관을 우리가 그대로 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꽃과 식물, 동물들과 더불어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보았다. 동양에서는 우주만물과 인간이 조화롭게 관계를 맺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인식하였다. 소크라테스까지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이 비슷하여, 옛날에는 우주 사물을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 희랍에서도 인간을 ‘소우주microcosmos’라고 했고, “우리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다.” 13) 라는 견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에 접어들어 1980년대 민중미술을 주목할 만하다. 민중미술은 전통을 적극 수용한다. 단순히 전통이 계승되어야 할 무엇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전통 속에 내재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기운 속에서 전통을 인지하였다. 탈춤, 불화, 민화 등을 통해 민중미술은 호흡하였고, 민중이 삶의 주체라는 인식과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이념은 삶의 주체를 살아 호흡하는 나 자신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냥 풀[꾸미기].jpg

박이소, <그냥 풀>, 1987년 


동시대미술과 전통의 현대성 


동시대 미술에서도 여전히 전통은 유효한 코드로 읽히고 변용된다. 그것은 퓨전동양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동양화의 새로운 흐름의 하나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로 팝아트에 동양적 요소를 끌어들여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을 변용한 작업은 크게 전통을 비틀고 전복하는 작업과 전통에서 유효한 가치를 자신의 작업에 녹여 작업하는 작가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전통 비틀기 작업은 박이소 14) 와 김학량 15) 과 박윤영이 있다. 박이소(1957-2004)는 1980년대 말 〈그냥 풀〉이라는 작업을 선보인다. 전통 사군자의 정신적 고매함의 가치를 비트는 작업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문인들이 군자의 소양과 덕목으로 난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난을 치는 것은 다른 옛 그림보다 더 고매한 정신적 가치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박이소는 현대에서 이런 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이어가는 것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조소하듯이 보여주었다. 사군자를 그리는 것은 문인들의 정신적인 소양을 통해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표출되었지만 박이소는 난이라는 식물은 ‘그냥 풀’이라는 사실을 전달함으로써 전통의 고매함을 비튼다. 사실, 한국화에서 전통을 답습하고 있는 경우에 전통의 현대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전통을 명맥만 유지하고 안위하는 것에는 일종의 답답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두 번째 전통 비틀기에 대표적인 작가는 김학량(1964-)이다. 김학량은 박이소가 난을 통해 전통을 전복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과 같이 전통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아파트 재건축을 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공사 현장에 무심히 솟아오른 철근의 모양이 어딘지 난의 모양과 닮아 있다. 공사 현장의 우연성을 사진으로 담아 인화한 후 화제를 네임펜으로 썼는데, 전통사회에서 난을 치는 것이 고매한 정신적 행위인 것에 반해 김학량의 난은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오브제에 작가가 현대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현대인의 삶의 현장에 무심히 파고든 난을 통해 전통사회의 고매한 정신성을 전복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박윤영(1968-)은 산수화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는데, 대표적인 작업이 <몽유생리도>이다. 〈몽유생리도〉는 생리대에 먹을 이용해서 전통 산수화를 그렸다. 작가가 TV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업한 것이다. 박윤영은 생리대처럼 우리 일상에 밀접하게 파고들고 있는 사물을 통해 전통을 변용한다. 전통은 진지하거나 고답적인 것이 아닌, 광고의 카피나 생수병의 조그만 산수 그림(박윤영의 ‘에비앙 산수’의 경우 산수화가 생활용품에 활용되는 것에 착안하여 작업이 이루어졌다.)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며, 현대인은 이러한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해 나간다. 또한 전통 산수화는 주로 문인 신분의 남성들만이 공유하고 이어져 오던 문화적 소양의 결과물이다. 이것을 생리대라는 지극히 여성적이고 은폐된 생활용품을 등장시켜 산수화로 옮긴 것은 남성 위주의 전통의 기호를 전복하려는 의지도 읽힌다. 


전통 비틀기 작업이 전통의 가치가 오늘날에 존속되는 것이 유효한 것인가를 묻고, 따지는 것이라면, 그와는 반대로 전통 속에서 유효한 가치를 자신의 작업으로 끌어들여 작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책가도, 산수화, 화조화, 문자도 등을 변용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발표되었던 글에서 포함되지 않은 작가로는 김근중 16) , 임택 17) 이 있다. (그동안 우주마가린을 통해 전통을 변용한 다수의 작가들이 언급되었다.) 김근중은 화조화에 말풍선을 삽입해 동양 정신을 사유하였고, 임택(1972-)의 경우, 실제 산수가 입체적인 공간임에 주목하고 산수를 입체적인 조형물로 만들었다. 또한 산수화가 입체적인 공간을 평면화 했던 것에 주목하여 다시 현대적인 평면성에 의미를 두어 사진으로 촬영하여 최종 작업을 완성하였다. 임택의 작업 역시 개인에 집중하는 서양의 가치관과는 다른, 구성원들의 관계 속에서 내 위치를 찾는 동양 고유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끝으로, 전통의 현대성의 문제는, 우리의 고유의 가치관의 존속이라는 주체적인 흐름과 전통은 낡은 것, 고답적인 것으로써 전복해야 하는 가치관으로 여기는 두 가지의 흐름 속에서 자리하고 있다. 전통을 전복하는 경우, 문인들의 고유의 영역인 문인화에 대한 반발이다. 문인화는 특정 계층에게만 향유되었던 고급문화이다. 박윤영의 경우도 문인화가 특정계층만이 향유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전통에서 유효한 가치를 끌어들이는 경우 전통회화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요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전통의 유효한 가치는 화조화에서 발견되는 즐거움, 산수화에서 표현되는 탈속성 등이다. 마찬가지로, 전통에서 우리 문화의 힘을 찾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으며, 미술뿐만 아니라 여러 콘텐츠에서 활발하게 변용되고 있다.  



1. 소암 이동식 - 정신과의사이자 도정신치료의 창시자 2014년 별세하였다.

2. 이동식, <한국인의 주체성과 도>, 일지사, 1974, p.35.

3. 고희동(1886-1965)- 대한제국 시기부터 동양화를 공부한 동양화가이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이다. 출처 위키백과

4. 김관호(1890-1954)- 일제강점기의 서양화가이다. 대표작으로 <해질녁>이 있다. 위키백과 참조. 

5. 나혜석(1896-1948)- 일제강점기와 대한제국의 서양화가, 여성운동가. 위키백과 참조.

6.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1889-1961)-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 위키백과 참조.

7. 강영희, <금빛 기쁨의 기억 - 한국인의 미의식>, 일빛, 2004, p. 80.

8. 윤희순(1902-1947)- 한국의 미술평론가, 서양화가

9. 강은아, <근대기 모란화의 전개양상 :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미술사연구회, 미술사연구 제 26호, 2012, pp. 251-253.

10. 변관식(1899-1976) - 근현대기에 활동했던 화가, 호는 소정(小亭)이다.

11. 강성원, <그림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 미술>, 사계절, 1997, p. 91.

12 박득순(1910-1990) - 꽃과 정물, 여인상 등을 그린 화가 

13. 이동식, <도정신치료입문 - 프로이드와 융을 넘어서>, 한강수, 2008, p. 202.

14. 박이소 - 회화, 평면등을 다룬 작가

15. 김학량 -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2009년 이동석 전시기획상 수상

16. 김근중 -  1986년 대만문화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1993년 토탈미술상 수상

17. 임택 - 대표작 <옮겨진 산수유람기> 시리즈  

 프로필이미지

박재은_자유기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경영을 전공하였다.
전시기획을 다루는 큐레이터에 호기심을 느끼고 진로를 정했지만, 역량 부족이다. 옛 그림을 좋아하고, 옛 그림과 현대미술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흥미롭다. 그림과 마음의 연관관계를 믿고 있다.